2008. 5. 28. 17:59
[그냥/괜히]
오랜만에 어디선가 보고 울컥하여 퍼옴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
조지훈
그날 너희 오래 참고 참았던 의분(義憤)이 터져
노도(怒濤)와 같이 거리로 거리로 몰려가던 그 때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연구실 창턱에 기대 앉아
먼산을 넋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두 시 거리에 나갔다가 비로소 나는 너희들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물결이
의사당 앞에 넘치고 있음을 알고
늬들 옆에서 우리는 너희의 불타는 눈망울을 보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면 나는 그날 비로소
너희들이 갑자기 이뻐져서 죽겠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쩐 까닭이냐.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길은 무거웠다.
나의 두 뺨을 적시는 아 그것은 뉘우침이었다.
늬들 가슴 속에 그렇게 뜨거운 덩어리를 간직한 줄 알았더라면
우린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기개가 없다고
병든 선배의 썩은 풍습을 배워 불의(不義)에 팔린다고
사람이란 늙으면 썩느니라 나도 썩어가고 있는 사람
늬들도 자칫하면 썩는다고……
그것은 정말 우리가 몰랐던 탓이다.
나라를 빼앗긴 땅에 자라 악을 쓰며 지켜왔어도
우리 머리에는 어쩔 수 없는 병든 그림자가 어리어 있는 것을
너희 그 청명한 하늘 같은 머리를 나무램했더란 말이다.
나라를 찾고 침략을 막아내고 그러한 자주(自主)의 피가 흘러서 젖은 땅에서
자란 늬들이 아니냐. 그 우로(雨露)에 잔뼈가 굵고 눈이 트인 늬들이 어찌
민족만대(民族萬代)의 맥맥(脈脈)한 바른 핏줄을 모를 리가 있었겠느냐.
사랑하는 학생들아
늬들은 너의 스승을 얼마나 원망했느냐
현실에 눈감은 학문으로 보따리장수나 한다고
너희들이 우리를 민망히 여겼을 것을 생각하면
정말 우린 얼굴이 뜨거워진다 등골에 식은 땀이 흐른다
사실은 너희 선배가 약했던 것이다 기개가 없었던 것이다.
매사에 쉬쉬하며 바로 말 한 마디 못한 것 그 늙은 탓 순수(純粹)의 탓
초연(超然)의 탓에 어찌 가책(苛責)이 없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너희를 꾸짖고 욕한 것은
너희를 경계하는 마음이었다. 우리처럼 되지 말라고
너희를 기대함이었다 우리가 못할 일을 할 사람은 늬들 뿐이라고-
사랑하는 학생들아
가르치기는 옳게 가르치고 행하기는 옳게 행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스승의 따귀를 때리는 것쯤은 보통인
그 무지한 깡패떼에게 정치를 맡겨놓고
원통하고 억울한 것은 늬들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럴줄 알았더면 정말
우리는 너희에게 그렇게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가르칠 게 없는 훈장이니
선비의 정신이나마 깨우쳐 주겠다던 것이
이제 생각하면 정말 쑥스러운 일이었구나
사랑하는 젊은이들아
붉은 피를 쏟으며 빛을 불러 놓고
어둠 속에 먼저 간 수탉의 넋들아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늬들의 공을 온 겨레가 안다.
하늘도 경건히 고개 숙일 너희 빛나는 죽음 앞에
해마다 해마다 더 많은 꽃이 피리라.
아 자유를 정의를 진리를 염원하던
늬들 마음의 고향 여기에 이제 모두 다 모였구나.
우리 영원히 늬들과 함께 있으리라.
1960. 4. 20.
국문과 교수였던 조지훈 시인이 4.18, 4.19를 지켜보면서 썼다는 이 시는 5월 3일자 고대신문에 실렸다고 한다. 그러다 재작년엔가 교내에 시비를 세웠다고 들었는데, 뭔가 일 처리가 이상해서 그걸 옮겨야 하느니 다시 만들어야 하느니 하면서 좀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는데 어떻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고..
1960년에는 학보에도 이 정도의 글이 실릴 수가 있었나 보다. 작년 대선이 있기 훨씬 전부터 무슨 선거운동 전단지처럼 되어 버린 (회비 납부 여부와는 상관없이 매달 집으로 배달되어 오는) 교우회보가 생각이 나서 참 슬펐다. 그런 인간도 교우니까 일단 무조건 찍어야 한다고.. 어디 가서 그 학교 나왔다는 얘기 하기가 요즘처럼 창피한 때가 없다.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촛불집회에 나가는 것이 좀 꺼려지긴 했다. 사안의 중대함이나 집회의 성격과는 별개로, 이번에도 또 냄비처럼 잠시 끓어오르다 금방 식어서 잊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지난 주말부터 보이는 소식들은 정말 나조차도 뛰쳐나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만들었는데,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정말 아무런 방법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2008년 촛불집회의 끝은 어떨까. 1960년? 1980년? 1987년? 아니면 2004년? 글쎄, 내가 보기에 그들 전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만들어낸 위대한 결과물을 엉뚱한 사람들이 가져가 버려서, 아니면 정말 쎈 놈이 물불 안가리고 다 밀어 버려서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싸워야 하는 그 꼰대는 1980년의 그 쎈 놈의 스타일을 닮았다. 그래서 굉장히 무서워졌다.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
조지훈
그날 너희 오래 참고 참았던 의분(義憤)이 터져
노도(怒濤)와 같이 거리로 거리로 몰려가던 그 때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연구실 창턱에 기대 앉아
먼산을 넋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두 시 거리에 나갔다가 비로소 나는 너희들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물결이
의사당 앞에 넘치고 있음을 알고
늬들 옆에서 우리는 너희의 불타는 눈망울을 보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면 나는 그날 비로소
너희들이 갑자기 이뻐져서 죽겠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쩐 까닭이냐.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길은 무거웠다.
나의 두 뺨을 적시는 아 그것은 뉘우침이었다.
늬들 가슴 속에 그렇게 뜨거운 덩어리를 간직한 줄 알았더라면
우린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기개가 없다고
병든 선배의 썩은 풍습을 배워 불의(不義)에 팔린다고
사람이란 늙으면 썩느니라 나도 썩어가고 있는 사람
늬들도 자칫하면 썩는다고……
그것은 정말 우리가 몰랐던 탓이다.
나라를 빼앗긴 땅에 자라 악을 쓰며 지켜왔어도
우리 머리에는 어쩔 수 없는 병든 그림자가 어리어 있는 것을
너희 그 청명한 하늘 같은 머리를 나무램했더란 말이다.
나라를 찾고 침략을 막아내고 그러한 자주(自主)의 피가 흘러서 젖은 땅에서
자란 늬들이 아니냐. 그 우로(雨露)에 잔뼈가 굵고 눈이 트인 늬들이 어찌
민족만대(民族萬代)의 맥맥(脈脈)한 바른 핏줄을 모를 리가 있었겠느냐.
사랑하는 학생들아
늬들은 너의 스승을 얼마나 원망했느냐
현실에 눈감은 학문으로 보따리장수나 한다고
너희들이 우리를 민망히 여겼을 것을 생각하면
정말 우린 얼굴이 뜨거워진다 등골에 식은 땀이 흐른다
사실은 너희 선배가 약했던 것이다 기개가 없었던 것이다.
매사에 쉬쉬하며 바로 말 한 마디 못한 것 그 늙은 탓 순수(純粹)의 탓
초연(超然)의 탓에 어찌 가책(苛責)이 없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너희를 꾸짖고 욕한 것은
너희를 경계하는 마음이었다. 우리처럼 되지 말라고
너희를 기대함이었다 우리가 못할 일을 할 사람은 늬들 뿐이라고-
사랑하는 학생들아
가르치기는 옳게 가르치고 행하기는 옳게 행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스승의 따귀를 때리는 것쯤은 보통인
그 무지한 깡패떼에게 정치를 맡겨놓고
원통하고 억울한 것은 늬들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럴줄 알았더면 정말
우리는 너희에게 그렇게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가르칠 게 없는 훈장이니
선비의 정신이나마 깨우쳐 주겠다던 것이
이제 생각하면 정말 쑥스러운 일이었구나
사랑하는 젊은이들아
붉은 피를 쏟으며 빛을 불러 놓고
어둠 속에 먼저 간 수탉의 넋들아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늬들의 공을 온 겨레가 안다.
하늘도 경건히 고개 숙일 너희 빛나는 죽음 앞에
해마다 해마다 더 많은 꽃이 피리라.
아 자유를 정의를 진리를 염원하던
늬들 마음의 고향 여기에 이제 모두 다 모였구나.
우리 영원히 늬들과 함께 있으리라.
1960. 4. 20.
국문과 교수였던 조지훈 시인이 4.18, 4.19를 지켜보면서 썼다는 이 시는 5월 3일자 고대신문에 실렸다고 한다. 그러다 재작년엔가 교내에 시비를 세웠다고 들었는데, 뭔가 일 처리가 이상해서 그걸 옮겨야 하느니 다시 만들어야 하느니 하면서 좀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는데 어떻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고..
1960년에는 학보에도 이 정도의 글이 실릴 수가 있었나 보다. 작년 대선이 있기 훨씬 전부터 무슨 선거운동 전단지처럼 되어 버린 (회비 납부 여부와는 상관없이 매달 집으로 배달되어 오는) 교우회보가 생각이 나서 참 슬펐다. 그런 인간도 교우니까 일단 무조건 찍어야 한다고.. 어디 가서 그 학교 나왔다는 얘기 하기가 요즘처럼 창피한 때가 없다.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촛불집회에 나가는 것이 좀 꺼려지긴 했다. 사안의 중대함이나 집회의 성격과는 별개로, 이번에도 또 냄비처럼 잠시 끓어오르다 금방 식어서 잊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지난 주말부터 보이는 소식들은 정말 나조차도 뛰쳐나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만들었는데,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정말 아무런 방법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2008년 촛불집회의 끝은 어떨까. 1960년? 1980년? 1987년? 아니면 2004년? 글쎄, 내가 보기에 그들 전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만들어낸 위대한 결과물을 엉뚱한 사람들이 가져가 버려서, 아니면 정말 쎈 놈이 물불 안가리고 다 밀어 버려서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싸워야 하는 그 꼰대는 1980년의 그 쎈 놈의 스타일을 닮았다. 그래서 굉장히 무서워졌다.